헬렌 식수(Hélène Cixous, 1937~ )는 프랑스의 페미니즘 이론가이자 문학비평가, 극작가, 소설가로, '여성 글쓰기(écriture féminine)' 개념을 통해 20세기 후반 페미니즘 문학이론의 지평을 넓힌 중심 인물입니다. 그녀의 이론은 데리다의 해체주의와 긴밀하게 연결되며, 언어 구조 속에 내재된 젠더 권력 관계를 해체하고 여성의 몸과 욕망, 감각이 살아 숨 쉬는 새로운 글쓰기 방식을 제안합니다. 식수의 대표작 『메두사의 웃음』은 전 세계 페미니즘 비평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텍스트 중 하나로, 여성 주체성과 문학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다시 묻는 작업으로 평가받습니다.
여성 글쓰기란 무엇인가: 몸으로 쓰는 언어
식수는 기존의 글쓰기가 오랫동안 남성 중심, 즉 ‘파르로고스 중심주의(phallogocentrism)’에 지배되어 왔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남성의 이성과 질서, 논리에 기반한 언어가 여성의 감각, 경험, 몸의 표현을 억압해왔다는 비판입니다. 그녀는 이러한 억압적 글쓰기 구조를 전복하고자 ‘여성 글쓰기(écriture féminine)’라는 개념을 제시합니다.
여성 글쓰기는 단순히 여성이 쓴 글이 아니라, 여성의 몸, 욕망, 무의식, 감정이 언어로 구현되는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의미합니다. 이는 논리와 질서보다는 파편성, 비선형성, 다성성(multiplicity)을 강조하며, 기존 문학적 질서를 해체하는 전략으로 작동합니다.
『메두사의 웃음』에서 식수는 "여자는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 그녀의 몸으로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는 억압된 여성 신체성과 주체성이 언어를 통해 회복될 수 있으며, 여성의 글쓰기는 곧 존재의 복원이라는 철학을 담고 있습니다. 식수의 글은 종종 시적이고 암시적이며, 전통적 수사학을 벗어난 감각적 글쓰기로 독자를 새로운 언어 경험으로 이끕니다.
해체주의와의 연관: 권력으로서의 언어 해체
식수는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에 강한 영향을 받았으며, 그녀의 글쓰기 전략은 해체주의의 핵심 개념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데리다가 말한 ‘로고스 중심주의’와 ‘이항대립’ 구조에 대한 비판은 식수의 성별 이분법의 해체로 확장됩니다.
식수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항대립 구도가 문화와 언어 속에 구조적으로 고정되어 있다고 보고, 이를 해체하기 위해 언어 그 자체를 흔들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는 단순한 여성 중심주의가 아니라, 기존 권력 구조와 의미 체계의 재구성을 의미합니다. 식수의 글에서는 전통적 문장 구성이나 의미 흐름이 의도적으로 해체되며, 새로운 문학 형식을 창조하는 실험이 이루어집니다.
그녀는 특히 글쓰기를 통해 억압된 타자성, 다양성, 차이를 드러내고자 하며, 이러한 글쓰기 방식은 젠더, 인종, 계급의 교차성을 반영하는 담론 확장의 가능성으로 기능합니다. 다시 말해, 식수의 해체적 글쓰기는 억압받는 모든 존재들을 위한 해방적 전략으로 작용합니다.
젠더와 문학의 정치성: 여성 주체의 회복
식수의 이론은 단순히 문학 스타일에 대한 논의가 아니라, 여성의 존재 방식, 말하기 방식, 사유 방식을 새롭게 열어가는 정치적 실천이기도 합니다. 그녀는 여성이 오랫동안 침묵하거나 타자의 위치에 머물도록 강요받아 왔으며, 그 결과 여성은 자기 몸과 언어로부터 소외되었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여성 주체성의 회복으로 이어지며, 이는 단지 개인의 해방이 아니라 사회 전반의 젠더 권력 구조를 흔드는 행위입니다. 식수의 문학은 개인적 경험과 신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언어화하면서, 기존 문학이 배제한 ‘타자성의 언어’를 중심으로 재구성합니다.
그녀의 글은 전통 문학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불편하고 낯설게 다가올 수 있지만, 바로 그 불편함과 낯섦이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힘이 됩니다. 식수의 문학은 해석보다 체험에 가깝고, 설명보다는 공감과 감각을 요구합니다.
결국 그녀의 이론은 문학을 정체성과 저항의 무대로 삼아, 여성뿐 아니라 모든 억압받는 존재들이 자신만의 언어를 가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이는 오늘날 페미니즘 문학뿐 아니라, 퀴어 문학, 탈식민 문학 등 다양한 해방적 서사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결론
헬렌 식수는 문학과 철학, 젠더와 언어의 경계를 허물며, 새로운 글쓰기의 가능성을 연 페미니즘 사상가입니다. 그녀의 ‘여성 글쓰기’는 단순한 문체의 문제가 아니라, 억압받던 존재들이 주체로 거듭나는 정치적 행위이며, 해체주의와 결합해 문학 이론을 근본적으로 뒤흔든 급진적 사유입니다. 오늘날 문학과 사회, 젠더를 새롭게 읽고자 한다면, 식수의 사유는 여전히 강력한 길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