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버트 사이먼(Herbert A. Simon, 1916~2001)은 경제학자, 심리학자, 인공지능 연구자, 행정학자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든 다학제적 학자로, 20세기 사회과학과 컴퓨터 과학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인간이 항상 최적의 선택을 하지 못하며, 정보와 계산 능력의 한계 내에서 결정을 내린다는 '제한된 합리성(Bounded Rationality)' 개념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인공지능의 초기 개념 정립과 의사결정 이론의 구조화에도 핵심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제한된 합리성: 인간 판단의 현실적 조건
기존 경제학 이론은 인간이 언제나 완전한 정보를 바탕으로 최적의 선택을 한다는 ‘합리적 인간(Rational Man)’ 모델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사이먼은 이러한 전제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음을 지적하며, 인간은 정보 처리 능력과 시간, 자원의 제약</strong 속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의 결정을 내린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이와 같은 사고방식을 ‘제한된 합리성’이라 명명하며, 이는 실제로 가능한 선택과 이론적으로 가능한 선택 간의 간극을 인식하게 해주는 개념입니다. 사람들은 가장 좋은 선택(optimal solution)을 찾기보다는, 주어진 조건에서 충분히 괜찮은 선택(satisficing)을 합니다.
이 개념은 조직행동론, 정책학, 행동경제학, 경영학 등 수많은 분야에서 응용되었으며, 오늘날 인간 중심 설계(Human-Centered Design), UX 디자인, 실천적 의사결정 프레임에도 핵심 전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AI 이론의 선구자: 계산 가능한 사고
사이먼은 앨런 뉴웰(Allen Newell)과 함께 초기 인공지능 프로그램 ‘로직 이론가(Logic Theorist)’를 개발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이들은 인간의 사고 과정을 컴퓨터로 모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수학적 정리를 기계적으로 유도하는 알고리즘을 구현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인공지능과 자동 추론 시스템의 시초로 평가됩니다.
그는 인간 사고를 하나의 정보처리 시스템으로 간주하며, 사고란 일련의 기호 조작이라는 점에서 컴퓨터와 유사하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견해는 인지과학(cognitive science)의 출발점이 되었고, 뇌-컴퓨터 유비(analogy)를 중심으로 한 현대 AI 연구의 철학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사이먼은 AI를 단지 기술이 아닌, 인간 지능의 본질을 탐구하는 학문으로 보았으며, AI의 발전은 인간 사고에 대한 이해를 더욱 심화시킬 수 있는 계기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태도는 오늘날 AI 윤리, 설명 가능한 AI(XAI), 인간-기계 협업 설계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출발점으로 작용합니다.
의사결정 이론: 조직과 정책 속의 사고 구조
사이먼의 『행정 행동(Administrative Behavior, 1947)』은 현대 조직이론과 정책결정 이론의 기초를 닦은 명저로 평가됩니다. 그는 조직 내 개인이 어떻게 의사결정을 내리는지를 분석하면서, 공식적 구조만큼이나 정보의 흐름, 절차, 규칙, 습관이 중요한 변수임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의사결정을 정보 수집 → 대안 설정 → 선택 → 실행의 연속적 과정으로 보고, 각 단계에서 인간의 인지적 한계와 제약을 고려한 설계가 필요하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논리적 모델이 아닌, 실제 행동과 구조에 기반한 ‘행동적 의사결정 이론’로 이어집니다.
오늘날 행정학, 정책학, 경영전략 분야에서 사용되는 대부분의 의사결정 모형(예: 합리모형, 점증모형, 혼합주사모형 등)은 그의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복잡한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프레임워크를 제공합니다.
결론
허버트 사이먼은 이론과 현실, 인간과 기계, 정책과 심리 사이의 경계를 연결한 지성입니다. 그의 '제한된 합리성' 개념은 인간 중심 사고의 출발점이며, AI 철학과 의사결정 구조의 설계에도 여전히 강력한 시사점을 줍니다. 사이먼의 사상은 오늘날 디지털 사회에서 더욱 절실한 통찰을 제공하며, 인간-기계-조직이 상호작용하는 모든 장면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