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오반니 아리기(Giovanni Arrighi, 1937~2009)는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경제학자이자, 세계체제론을 대표하는 학자 중 한 명입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전개를 장기 구조 변화의 관점에서 분석하며, ‘패권의 순환’과 ‘자본의 축적 단계’를 중심으로 세계경제를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특히 그의 대표 저서인 『장기 20세기(The Long Twentieth Century)』는 브로델, 월러스틴의 이론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세계체제 분석 모델을 제시한 작품으로,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와 미래를 전망하는 데 중요한 이론적 틀을 제공합니다.
자본주의의 구조: 축적과 금융화의 반복
아리기는 자본주의가 단순히 무한한 성장의 체계가 아니라, 일정한 축적-금융화-위기-전환의 사이클을 반복해 온 체계라고 봅니다. 그는 자본주의의 역사 속에서 물질적 축적이 한계에 다다르면, 자본은 금융화로 방향을 바꾸며 새로운 수익 모델을 모색한다고 분석했습니다. 이 과정은 금융의 팽창과 함께 투기, 불균형, 위기로 이어지며, 결국 새로운 국가 또는 지역으로 중심이 이동하는 계기를 만듭니다.
그는 역사 속 네 차례의 장기적 축적 사이클을 제시했습니다. ① 제노바 중심의 축적 체제(15~16세기), ② 네덜란드 중심의 해양상업 자본주의(17세기), ③ 영국 중심의 산업 자본주의(18~19세기), ④ 미국 중심의 금융자본주의(20세기)가 그것입니다. 각 사이클은 물질적 확장 이후 금융 중심의 축적으로 전환되며, 패권국가의 교체로 귀결됩니다.
아리기는 이러한 축적 체계를 ‘시공간적 고정(spatio-temporal fix)’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즉, 자본은 위기 시마다 새로운 지역(공간)과 새로운 방식(시간적 지연)을 통해 이윤 창출을 지속하며, 이로 인해 세계 자본주의는 항상 지리적 이동과 구조적 전환을 겪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계체제론과의 차별화: 월러스틴과의 비교
아리기는 이매뉴얼 월러스틴과 함께 세계체제론을 대표하는 인물로 꼽히지만, 두 사람의 분석 틀은 뚜렷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월러스틴이 핵심-주변-반주변의 구조를 중심으로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수직적 위계에 초점을 맞췄다면, 아리기는 시간을 중심으로 한 축적 사이클의 수평적 전환에 주목합니다.
즉, 월러스틴은 세계경제의 구조적 불균형과 제국주의적 관계를 분석하는 데 중점을 둔 반면, 아리기는 패권국가의 흥망과 금융자본의 팽창-위기 과정을 이론화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또한 아리기는 브로델의 역사학적 접근을 계승하여, 자본주의를 단지 경제학적 현상이 아닌 역사적 질서와 국가 간 권력관계가 얽힌 총체적 체제로 보았습니다.
이러한 분석은 단순히 자본의 흐름을 추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세계사 속 국가들의 전략, 기업가 집단의 역할, 금융화의 정치경제적 효과 등 다차원적 요소를 통합적으로 해석하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패권의 순환과 중국의 부상
아리기는 패권국가의 순환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동학을 설명합니다. 그는 미국이 20세기 패권을 확립하면서 산업 중심에서 금융 중심으로 전환하는 과정을 ‘미국 중심의 장기 20세기’로 규정했고, 이후 세계경제의 질서가 다시 전환점에 들어섰다고 진단했습니다.
특히 그는 21세기 초반 저서인 『아담 스미스 인 베이징(Adam Smith in Beijing)』에서 중국의 부상을 새로운 세계적 중심축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중국이 전통적인 서구식 제국주의 모델이 아닌, ‘시장 중심의 비서구적 축적 전략’을 통해 ‘자본주의 그 너머’를 상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는 중국이 경제 성장과 국제 영향력을 강화하는 동시에, 비교적 자율적인 개발 경로를 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국식 패권과는 구별된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국력의 이동을 넘어, 새로운 형태의 세계경제 질서 전환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결론
지오반니 아리기는 자본주의의 구조를 장기적·역사적 관점에서 분석하며, 세계체제의 순환성과 패권교체의 논리를 정교하게 제시한 학자입니다. 그의 이론은 현재의 세계경제 위기와 지정학적 재편, 중국의 부상과 같은 현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유효한 틀을 제공합니다. 아리기의 사상은 단순한 경제 분석을 넘어,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게 하는 정치경제학의 미래를 제시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