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과학철학자로, 현대 과학기술연구(STS: Science, Technology and Society)의 핵심 이론가 중 한 사람입니다. 그는 과학과 기술을 단순한 ‘객관적 발견’이 아니라, 사회적, 정치적, 물질적 요소들이 얽힌 복합적인 행위의 결과로 바라보았습니다. 라투르의 가장 대표적인 이론은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으로, 인간과 비인간, 자연과 기술, 사회와 과학의 경계를 허물고, 이들을 ‘네트워크의 구성원’으로 동등하게 분석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과학사회학, 기술철학, 환경정치, 디지털 연구 등 여러 분야에서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STS(과학기술사회연구)에서의 패러다임 전환
전통적으로 과학은 ‘자연의 진실’을 밝혀내는 활동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사회는 과학과 구분되는 별개의 영역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라투르는 이러한 구분을 비판하며, 과학 지식 역시 사회적·문화적 조건 안에서 구성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즉, 실험실에서 과학자가 관찰한 사실도 측정기기, 실험 환경, 해석 방식 등 다양한 요소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성립된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라투르는 『실험실 생활(Laboratory Life)』에서 바이러스 연구 현장을 분석하며, 바이러스라는 존재조차도 인간의 기술, 담론, 실험 장비, 논문, 자금 등 수많은 요소가 동원된 끝에 구성된 ‘결과물’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이는 과학을 사회적 맥락에서 다시 바라보게 만드는 전환점이 되었고, STS 분야가 학문적으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라투르는 과학이 단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실천을 통해 ‘구성’되는 것이라고 주장하며, 과학과 사회의 이분법을 넘어선 분석을 제안했습니다. 이로써 그는 과학 지식이 중립적이거나 자동적으로 생성된다는 전제를 해체하고, 그 이면의 권력 관계와 제도적 조건들을 드러냈습니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인간과 비인간의 평등한 분석
라투르의 가장 독창적인 이론은 단연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입니다. ANT는 인간만이 아니라 비인간(기계, 도구, 문서, 바이러스 등)도 사회를 구성하는 ‘행위자’로 본다는 점에서 기존 사회이론과 구분됩니다.
기존 사회학은 사람, 제도, 집단 등만을 사회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지만, 라투르는 인간과 비인간 모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네트워크’를 구성한다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어, 철도 시스템을 이해하려면 기관사나 승객뿐 아니라 신호등, 선로, 시간표, 알고리즘까지도 하나의 행위자로 보아야 전체 구조가 보입니다.
이러한 시각은 다음과 같은 ANT의 핵심 원칙에서 출발합니다:
- 이질적 요소의 연결: 인간과 비인간이 결합하여 네트워크를 형성함
- 평등한 행위성: 어떤 대상이든 다른 대상에 영향을 미치면 ‘행위자’로 간주
- 중심 없음: 네트워크에는 고정된 중심이 없고, 관계의 구성에 따라 권력과 구조가 형성됨
이 이론은 특히 기술 시스템, 생태계, 인터넷 플랫폼 분석 등에 적용되어, 복잡한 사회현상을 유기적이고 다층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강력한 도구로 자리잡았습니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 근대성과 구성주의 비판
라투르의 또 다른 대표 저작인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We Have Never Been Modern)』는 근대적 이분법—자연과 문화, 과학과 정치, 인간과 비인간—의 허구성을 비판한 작업입니다.
그는 근대사회가 과학은 ‘자연을 그대로 반영하는 중립적 지식’이고, 정치는 인간의 가치와 판단의 영역이라고 구분해 왔다고 지적합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과학 기술이 정치와 얽히고, 자연현상이 사회적 해석을 통해 구성되며, 인간과 비인간이 혼종적으로 작동하는 사례가 매우 많습니다.
예를 들어, 기후 변화는 단순한 자연현상이 아니라 기술, 경제, 환경 운동, 정책 결정 등 수많은 사회적 요소가 얽힌 ‘하이브리드 객체’입니다. 라투르는 이러한 ‘자연-문화의 혼종’을 인정하고 분석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사회이론과 과학철학의 틀을 제시했습니다.
그는 진정한 의미의 탈근대성을 위해서는 이분법이 아닌 ‘연결성, 상호작용, 구성적 관계’를 중심에 두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며, 과학, 기술, 사회가 서로 구성하는 실재의 조건을 탐구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결론
브루노 라투르는 과학, 기술, 사회를 해체하고 재구성한 현대 철학의 중심 인물입니다. 그는 인간 중심의 시각을 넘어, 기계와 데이터, 자연과 도구, 정책과 기술 모두를 동등한 분석 대상으로 보며 새로운 해석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환경정치, 기술윤리, 데이터 사회, 플랫폼 자본주의를 이해하는 데 실질적 분석틀을 제공하며, 앞으로의 ‘탈근대적 지식사회’를 구성하는 데 결정적 사유의 자원으로 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