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노 라투르(Bruno Latour, 1947~2022)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이며, 과학기술학(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STS)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학자입니다. 그는 과학이 단순히 ‘객관적 진리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기존 통념을 비판하고, 과학 지식도 사회적, 물질적, 정치적 맥락에서 구성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Actor-Network Theory)을 통해 인간과 비인간, 사회와 기술의 경계를 해체하며, 지식 생산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STS: 과학은 사회 속에서 만들어진다
과학기술학(STS)은 과학을 단지 ‘사실’의 축적이 아닌, 사회적, 역사적 맥락 안에서 형성된 구성물로 보는 학문입니다. 라투르는 이 분야에서 “과학은 순수하지 않다”고 선언하며, 실험실, 과학자, 기계, 자본, 정책, 여론 등 다양한 요소들이 과학적 사실을 구성하는 과정에 얽혀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의 대표작 『연구실 생활(Laboratory Life)』(1979, 공저자 스티브 울가)에서는 실제 생물학 연구소를 민족지학적으로 관찰하면서, 과학자가 ‘사실’을 어떻게 설득, 기록, 문서화, 배포하는지를 면밀히 분석합니다. 그는 실험 결과 자체보다, 그것이 어떻게 문서화되어 사회적 네트워크를 통해 ‘사실화’되느냐에 더 주목했습니다.
라투르에게 있어 과학은 ‘발견’이 아니라 ‘구성’이며, 이 구성에는 연구 장비, 시약, 연구비, 정부 정책 등 비인간 행위자도 깊이 관여합니다. 이러한 관점은 과학의 중립성과 객관성을 해체하고, 과학을 사회적 실천으로 바라보는 새로운 틀을 제공합니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NT): 인간과 비인간의 연결
라투르의 ANT는 전통적인 이분법(주체/객체, 사회/자연, 인간/비인간)을 해체합니다. 그는 인간만이 사회를 구성한다는 전제를 부정하며, 비인간(예: 기술, 기계, 알고리즘, 자연물)도 사회적 행위자로 간주합니다. ANT는 세상은 수많은 이질적 행위자들 간의 네트워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연결 자체가 현실을 만들어낸다고 주장합니다.
예를 들어, 병원에서 진료가 이뤄질 때 환자, 의사, 차트, 진단기계, 약물, 행정시스템, 컴퓨터 모두가 ‘행위자’로 작용하며, 이들이 연결되어 하나의 ‘의료 네트워크’를 구성합니다. 여기서 진단이라는 결과는 단지 의사의 판단이 아니라, 네트워크 전체의 산물입니다.
ANT의 핵심은 권력이나 인과성이 사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안의 관계를 통해 만들어진다는 것입니다. 이 이론은 과학뿐만 아니라 정치, 환경, 기술 정책, 디자인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현실 구성 방식을 설명하는 유용한 도구로 사용됩니다.
지식사회학과 포스트휴먼 전환
라투르의 이론은 전통적인 지식사회학과도 깊이 연결됩니다. 그는 지식이 특정 엘리트만의 전유물이 아니며, 다양한 행위자와 환경 속에서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실천임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은 지식 권위에 대한 비판, 탈중심화된 지식 이해, 참여 기반의 지식 생산이라는 흐름으로 이어집니다.
특히 라투르의 사상은 포스트휴먼 이론과도 접점을 가집니다. 인간 중심주의를 벗어나, 자연, 동물, 사물, 기술 등이 동등한 행위자로 참여하는 사회를 상상하며, 지구적 연대와 생태적 정치를 강조했습니다. 그의 저서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1991)는 과학과 사회, 인간과 자연의 분리라는 근대의 환상을 해체하고, 복합적 연결성과 비경계성의 시대를 선언합니다.
라투르는 팬데믹, 기후위기 등 초국가적 문제 앞에서, 더 이상 인간만의 중심적 세계관으로는 대응이 불가능하다고 강조하며, 복잡한 행위자 네트워크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책임과 과학적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결론
브루노 라투르의 이론은 과학, 사회, 인간, 기술의 관계를 완전히 새롭게 조명하게 합니다. 그는 진리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 지식은 소수가 아닌 네트워크 전체의 산물임을 알려줍니다. 오늘날 빠르게 변화하는 기술 사회 속에서, 라투르의 ANT는 복잡성과 다원성이 공존하는 현실을 이해하기 위한 강력한 도구가 됩니다.